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거 JK (문단 편집) == 활동 == 타이거 JK는 1974년 7월 29일, 서울에서 음악 평론가인 아버지 서병후와 와일드 캣츠의 리더였던 어머니 김성애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화 [[고고70]]에서 극중 이성민이 맡은 배역이 서병후씨, 신민아가 맡았던 배역이 김성애씨를 롤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가족은 로스앤젤로스로 갔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홀로 마이애미로 가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던 삼촌 아래서 자랐다. 이때 태권도 선수를 목표로 연습을 했다고 한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뮤직비디오에서 무술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베벌리힐스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집이 비버리힐즈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지론이 학교는 좋은 학교를 가야한다고 해서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안젤리나 졸리]]와 같이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1992년, 자신이 존경했던 힙합 그룹 [[N.W.A]]의 멤버인 [[아이스 큐브]]가 해체 후 솔로 활동을 하면서 [[LA 폭동]]으로 혼란스럽던 1992년 흑인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흑인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는 한국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Black Korea]]란 곡을 냈다. 이에 타이거 JK는 역사시간에 논문과 음악에 대한 반박하는 랩을 하였는데 교내에서 상을 받았고 이어 그에 관련된 소문이 커져 힙합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힙합 페스티벌에 초청된 고등학생 타이거 JK는 "Call Me Tiger[* 몇몇 방송에서 이 노래를 짧게 재현했던 적이 있다. 태권도를 하던 JK의 경험 때문인지, 가사에 [[앞차기]], [[돌려차기]] 등이 한국어로 나온다.]"를 통해 한인 비하에 대해 반박하였고 즉흥 랩 부문에서 수상하였고 같은 한국계 미국인인인 [[DJ 샤인]][* 샤인은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드렁큰 타이거 극초창기 시절 당시 댄스그룹이었던 C2K(aka Cost Cost)의 멤버를 겸했다.]을 만나 [[드렁큰 타이거]]를 결성하게 된다. 이후 당시 최고의 토크쇼인 <[[쟈니 윤]] 이야기쇼>에도 초대되는 등 화제를 일으킨다. ||[youtube(3_HbPl8nJ-0)]|| || 1992년 SBS <쟈니윤 이야기쇼>에 출연한 타이거 JK의 방송분. (위 영상 47초부터) || 1995년 JK는 미키 아이즈(Micki Eyez)라는 친구와, 수크람(Sucram)이라는 흑인 친구 등 3인조[* 같은 태권도장을 다니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고 한다. 때문에 두 친구 모두 한국어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로 힘을 합쳐 만든 EP격 앨범 'Enter The Tiger'[* 이 앨범은 소수만 찍어냈던지라 현재는 말그대로 레어... 아니, 유닉 수준의 취급을 받고 있는 앨범이다. 2012년 CD 버전으로 재발매되었다. 참고로 이 앨범의 인트로는 [[2Pac]]의 Me Against The World이다.]를 만들어 한국에 들어왔으나, 당시엔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 심지어 음악 다운로드 사이트나 mp3 플레이어/파일도 없었다. 1997년에야 미국에서 세계 최초 음악 다운로드 사이트 'mp3.com'이 생겼다.] 힙합에 대한 한국의 인식수준은 너무나도 얕았던지라 사람들의 반응은 미미했으며 방송국 등지에서도 "검둥이하고 뭐하는 짓이냐", "춤이 없어서 안 된다", "한국말도 못 하면서 뭘 할 셈이냐" 등의 말만 듣고 문전박대 당했고, 아버지 서병후까지 거론하며 "아버지는 훌륭한 분인데 아들은 양아치 문화나 배워온다"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인들은 힙합 패션과 힙합 춤은 알아도 '''힙합 음악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PD는 "힙합은 이런 것"이라면서 [[룰라]]의 노래를 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이런 점들이 발목을 잡아 방송활동은 SBS의 예능프로그램 <점프챔프> 27회(1995년 8월 24일 방영)에 딱 한 번 출연한 것을 고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공연했던 곡은 [[드렁큰 타이거]] 1집 수록곡이기도 했던 Ha Ha Ha였다. 당시 급하게 댄서 한 명을 섭외해서 방송에 출연했는데, 이 댄서는 타이거 JK의 [[여동생]]이었다.] 이 당시의 이야기는 7집 수록곡인 '매일밤 01'에도 언급되어있다. ||[youtube(nPTyYD8X1KA)]|| || 1995년 <점프챔프>에 출연한 타이거 JK의 방송분. (위 영상 3분 39초부터) || 이에 좌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UCLA]]에 입학한 뒤 공부에 매진하던 JK는 1997년 가벼운 초대에 응하여 다시 한국으로 향한 뒤 길거리 공연 및 각종 행사로 서서히 이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지누션, 이현도 등에 의해 힙합이 대중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으며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인 BLEX나 클럽 MP 등을 통해서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등 힙합에 대한 인식이 1995년보다는 꽤 나아진 상황이었다. 1998년에는 [[김진표(가수)|김진표]]의 2집에 미키 아이즈와 함께 영어 랩 피처링을 하기도 했다. 1999년부터는 힙합이 번성하면서 홍대 거리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1996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힙합 음악을 몰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JK의 이야기는 7집 수록곡 '매일 밤 01'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2년 뒤인 1999년 [[DJ 샤인]]과 [[드렁큰 타이거]]를 결성한다. 드렁큰 타이거로서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드렁큰 타이거]] 문서를 참조. 2013년부터는 아내인 [[윤미래]], 래퍼 [[비지(래퍼)|비지]]와 함께 [[MFBTY]]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으며, 회사인 [[필굿뮤직]]을 통해 힙합, 알앤비 아티스트들을 양성하고 있다. 밑의 문단처럼 사건사고가 많은 래퍼지만 대중들에게 가장 이미지가 좋은 래퍼 중 하나다. 필굿뮤직이나 MFBTY의 음악이 굉장히 온화한 편이며 타이거 jk 또한 굉장히 매너있고 인품이 좋단 평가를 받는 래퍼이기 때문에 사건사고가 많음에도 대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기 때문인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